장마 뒤에 오는 소나기처럼, 한 달 가까이 이어지던 무더위 끝에 오늘 비가 내렸다. 태풍의 영향으로 모처럼 하늘이 열린 것이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세상이 갑자기 달라 보인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공기는 한결 부드러워지고, 메말랐던 나무와 풀은 다시 제 빛깔을 찾는다. 늘 보던 풍경인데도 새삼 낯설다. 어쩌면 신세계란 반드시 새로운 장소일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익숙했던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바로 그 순간이 곧 신세계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 어울리는 곡, 안토닌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마단조, 작품번호 95, 《신세계로부터》.
이 곡은 1893년, 체코 출신의 민족주의 음악가 드보르작이 뉴욕 내셔널 음악원 원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완성한 작품이다. 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음악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음악이야말로 진짜 미국의 소리라고 믿었고, 그 믿음을 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흑인들의 선율에서 위대하고 고귀한 음악 학파를 세우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발견했다고. 이 발언은 당시 미국 음악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다고 전해진다.
그 믿음을 실제 소리로 옮겨준 사람은 음악원에서 만난 제자 해리 T. 벌리였다. 벌리는 노예였던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영가를 즐겨 불렀고, 드보르자크는 그 노래에 깊이 매료되었다. 드보르작 자신은 특정 선율을 그대로 가져다 쓴 적은 없고, 다만 흑인과 인디언 음악의 정신을 자신의 언어로 재창조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벌리를 비롯한 여러 증언에 따르면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 진다. 1악장에 등장하는 플루트 선율은 영가 <스윙 로, 스위트 채리엇>과 놀랄 만큼 닮아 있어서, 벌리는 훗날 드보르작이 이 선율을 의식적으로 가져다 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정신을 빌렸을 뿐이라는 작곡가 자신의 말과, 사실상 인용에 가까웠다는 주변의 증언 사이에서 진실은 아마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드보르작은 그해 봄 뉴욕에 도착한 버팔로 빌의 서부 쇼에서 오글라라 라코타 부족 공연자들의 춤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서른 살 무렵 체코어로 번역된 롱펠로의 서사시 <하이아와타의 노래>를 읽고 큰 감명을 받은 터였다. 이 두 경험이 교향곡 곳곳에 스며들었다.
곡은 모두 네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첼로의 느리고 무거운 서주로 문을 여는 1악장은 곧이어 오음 음계 느낌의 활기찬 주제로 전환되고, 앞서 말한 영가풍의 서정적인 선율이 뒤를 잇는다. 2악장 라르고는 이 교향곡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대목이다. 잉글리시 호른이 연주하는 애절한 선율은 드보르작 스스로 하이아와타가 연인 미네하하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착안했다고 밝힌 바 있다. 훗날 그의 제자 윌리엄 암스 피셔가 이 선율에 가사를 붙여 <고잉 홈>이라는 노래로 만들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 곡을 원곡보다 먼저 접한다. 3악장 스케르초는 빠르고 리드미컬한 춤곡으로, 드보르자크는 이 대목이 <하이아와타> 속 인디언들의 축제에서 벌어지는 춤 장면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4악장에 이르면 앞선 세 악장의 주요 선율들이 하나둘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웅장한 행진곡풍과 뒤섞여 곡 전체를 장엄하게 마무리한다.
교향곡은 그해 여름 드보르작이 가족과 함께 머문 아이오와주 스필빌에서 마지막 손질을 거쳐, 같은 해 12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초연되었다.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사람은 안톤 자이들이었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청중은 악장이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평소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꺼렸던 드보르작도 그때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고 한다. 다음 날 한 신문은 이 작품을 두고 이 나라에서 작곡된 가장 위대한 교향악이라 평했다.
고향을 떠나온 한 이방인이 낯선 대륙에서 들은 소리들, 억눌린 자들의 노래와 대지에서 솟아난 리듬 속에서 자신의 보헤미아를 떠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 곡을 특별하게 만든다. 가장 사무치게 그리운 것은 결국 가장 낯선 것들 사이에서 발견되곤 한다. 신세계라는 제목이 붙었지만, 이 곡 안에 흐르는 정서는 실은 아주 오래된 그리움이다. 낯선 땅에서 익숙한 마음을 재발견하는 일,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신세계를 만나는 방식일지 모른다.
비 갠 창밖을 보며 내가 마주한 것도 새로운 풍경이 아니라, 무더위에 잠시 잊고 지냈던 오래된 계절의 얼굴이었을 뿐이라고. 드보르작이 신대륙에서 결국 고향의 그리움을 발견했듯, 우리도 가장 익숙한 곳에서 뜻밖의 새로움을 만나곤 한다. 오늘 같은 날, 신세계의 그 선율 한 소절을 다시 들어보는 것도 좋겠다.













